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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권]성난 얼굴로 심판한 국민


오전 10시 쯤 투표장을 찾았다. 별 기대도 없고 흥분도 없었다. 그냥 '쿨' 했다.

어라? 이상했다. 웬 일이지? 줄이 길게 늘어 있어서였다. 생각 밖의 풍경이었다. 투표장이 썰렁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낯익은 주민들이 여럿 눈에 띄였다. 투표장에서 아는 사람 만나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러기를 두 달이 넘었다. 반복된 학습효과 때문이었으리라. 국민들의 사고는 '천안함 프레임'에 완전히 갇힌 것처럼 보였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도 여당의 낙승을 전했다.

한나라당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천안함 사건을 선거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흘렸다. '이겼다'는 의사 표시를 그렇게 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선거운동 지원 요청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승리 후 뒷풀이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그렇게 이번 6.2 지방선거는 해보나마나 한 것처럼 여겨졌다. 결과가 뻔할 것 같으니, 투표율도 매우 낮을 것으로 예상됐다. 게다가 임시공휴일로까지 지정됐으니...

그러나 국민들은 언론사와 한나라당이 미뤄 짐작한 '그런 국민들'이 아니었다. 투표율이 54.5%로 나왔다. 2002년과 2006년 지방선거 때의 48.8%, 51.6%를 훌쩍 뛰어넘었다. 2008년 총선 투표율 46.1%에 비해선 무려 8.4%나 높았다. 이 정도면 국민들이 투표장에 '쏟아져 나온' 셈이다. 많은 국민들이 "이번엔 투표해야 겠다"고 작심했다는 뜻이다.

투표장이 붐볐던 것은 심상찮은 투표결과를 예고하는 전조였다. 여당은 대패했다. 참패였고, 완패였다. 패배를 수식할 그 어떤 말도 부족해 보인다. 만일 천안함 사건이 없었더라면, 또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공개 수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여당은 거의 전패할 뻔 했다.

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 국민이 정말 무섭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뻔한 선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기자도 우리 국민을 과소평가한 점, 뼈 속 깊이 반성한다.

정치권은 이슈를 만들어 부각시키고,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유도하면 국민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정치권이 '선거공학'의 잣대로 보는 객체가 아니었다. 우리 국민은 합리성을 잃지 않은 집단지성이었고 주체였다. 입력하는대로 기억해놓는 메모리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프로세서였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벌어진 일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지표가 호전됐다지만, 서민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없는 착시였음을. 일부 대기업 실적은 좋아졌지만 많은 중소기업들이 한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취업 상황이 더욱 악화돼 청년들은 꿈과 미래를 접고 있음을. 세종시 수정, 4대강 사업이 무리하다고 비판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고 밀어붙이는 독선과 고집을. 그래서 도무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답답함을. 경찰, 검찰, 교육계, 공직의 부패와 비리가 창궐하고 있음을. 가속화되는 남북 신냉전, 대결 구도로 전쟁의 공포와 불안에 잠 못들고 있음을. 바른 생각, 바른 생활하는 사람들을 '좌빨'로 규정하는 매카시즘 망령의 부활을. 인터넷과 디지털을 무슨 벌레 보듯 하는 그들의 시대착오와 편협함을. 심지어 국민이 사랑하는 '착한 스타' 김제동, 김미화, 윤도현 등이 '미운털' 때문에 불이익 받는 짜증나는 현실을...

국민들은 냉정하게 심판했다. 이명박 정부 임기 절반을 맞아 중간평가 시험에서 낙제점에도 한참 미달하는 30점만 준 것이다. '이번은 맛보기였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때는 더욱 혹독한 심판을 각오하라'는 경고장까지 보냈다. 성난 얼굴로.

이명박 정부는 이제 임기가 절반 남았다. 남은 절반의 관전 포인트를 이번 6.2 지방선거가 던졌다. 오만과 독선과 불통이 계속되는지, 말로만 '서민'과 '민생'을 사칭하는지, 청년에게 꿈과 미래를 줄 것인지, 남북을 피튀기는 격투기장으로 끌고가는지, 공복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공직 비리가 계속되는지...

국민들은 전과 다름없이 성난 얼굴로 지켜볼 것이다.

/이재권 논설실장 ja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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